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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밥솥과 대화하는 연극, 구자하가 국제입센상을 받은 이유

이로운별별별 2026. 9. 2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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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배우 대신 전기밥솥 세 대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밥솥들이 말을 합니다.

 

한 남자는 그 밥솥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와 청년 세대의 불안, 경쟁,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조금 낯설고, 처음 보면 “이게 연극이라고?”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만들어온 한국 공연예술가 구자하가 세계 연극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2026 국제입센상(International Ibsen Award)을 받았습니다.

 

구자하는 이 상을 받은 아시아 최초이자 역대 최연소 수상자입니다.

 

그리고 9월 26일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직접 상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한국인이 큰 상을 받았다는 소식도 의미가 있지만, 더 흥미로운 건 따로 있습니다.

 

도대체 전기밥솥과 대화하는 연극이 왜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을까요?

 

먼저, 국제입센상은 어떤 상일까?

국제입센상은 노르웨이 정부가 2007년 제정한 세계적인 연극상입니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고, 현재는 격년제로 수여됩니다.

 

이 상이 흥미로운 이유는 특정 작품 하나만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예술가나 극단이 오랫동안 보여준 작업 세계 전체와 연극에 끼친 영향을 평가합니다.

 

역대 수상자에는 세계적인 연출가 피터 브룩을 비롯해 욘 포세, 페터 한트케 같은 인물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욘 포세와 페터 한트케는 이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제입센상은 국내외 언론에서 종종 ‘연극계의 노벨상’이라고 소개됩니다.

 

다만 이는 공식 명칭이 아니라, 상의 권위와 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별칭에 가깝습니다.

 

2026년 수상자로 선정된 구자하는 이 상의 아시아 최초 수상자이자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습니다.

 

구자하는 우리가 떠올리는 전통적인 연극 연출가와 조금 다릅니다

구자하를 단순히 ‘연극 연출가’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부족합니다.

 

국제입센상 공식 소개는 그를 공연 창작자(theatre maker)이자 작곡가, 비디오 아티스트로 소개합니다.

그의 공연에는 영상과 음악, 텍스트, 오브제, 로봇과 같은 기술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래서 무대에서 사람이 연기하는 전통적인 연극과는 꽤 다른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Cuckoo》입니다.

 

배우 대신 전기밥솥 세 대가 무대에 등장한 이유

《Cuckoo》의 무대에는 구자하와 함께 전기밥솥 세 대가 등장합니다.

 

평범한 밥솥이 아니라, 해킹과 개조를 통해 말을 하도록 만든 전기밥솥입니다.

 

구자하는 이 밥솥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해 한국 사회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나타난 경제적 압박과 경쟁, 청년 세대가 느끼는 고립과 불안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밥솥은 단순히 웃기거나 기발한 소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생활용품을 하나의 ‘공연자’로 바꾼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구자하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연극 무대에는 꼭 사람이 서야 할까?”

 

사람 아닌 것도 ‘배우’가 될 수 있을까?

구자하는 자신의 작업에서 계속 연극의 경계를 질문해왔습니다.

 

누가 무대에 설 수 있는가.

 

누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를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전기밥솥이 말을 하고, 영상과 음악이 무대의 일부가 되며, 사람이 아닌 기계가 등장인물처럼 기능하는 이유도 이 질문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그의 공연을 보면 처음에는 낯설지만, 보다 보면 묘한 느낌이 생깁니다.

 

밥솥이라는 평범한 물건이 어느 순간 하나의 인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관객은 결국 밥솥보다 그 밥솥을 통해 이야기되는 인간의 삶을 보게 됩니다.

 

개인적인 경험이 한국 사회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구자하의 작품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특징은 매우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작품군이 ‘하마티아 3부작(Hamartia Trilogy)’입니다.

  • 《Lolling and Rolling》
  • 《Cuckoo》
  • 《The History of Korean Western Theatre》

이 작품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다루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한국과 동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 구조, 식민의 흔적과 서구적 기준이 오늘날까지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를 살펴본다는 점입니다.

 

한국을 떠나 유럽에서 생활한 경험 역시 작품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줬습니다.

 

바깥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 사회를 새롭게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가장 최근에는 ‘하리보’와 ‘김치’를 붙였습니다

최근 작품 가운데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습니다.

 

《Haribo Kimchi》

하리보 젤리와 김치.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조합 자체가 작품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이 작품은 음식과 디아스포라 경험을 통해 문화적 동화, 타자화, 그리고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을 다룹니다.

 

오랜 시간 유럽에서 생활한 구자하가 느낀 정체성과 소속감의 문제를 음식과 기억, 여행 경험을 통해 풀어내는 겁니다.

 

구자하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문제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해 결국 세계적인 질문으로 확장합니다.

 

국제입센상은 왜 구자하에게 상을 줬을까?

국제입센상 위원회가 주목한 것도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위원회는 구자하의 작업이 기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며 디지털 기술이 일상이 된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보여준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기술 그 자체를 칭찬했다기보다, 그 기술을 이용해 연극이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한다는 점입니다.

 

전기밥솥을 무대에 세운다고 모두 새로운 연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왜 밥솥이어야 하는지, 왜 영상과 음악이 들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입니다.

 

구자하의 작품에서는 이 기술들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의 일부가 됩니다.

 

“나는 연극을 계속 의심한다”

이번 시상식에서 구자하가 남긴 말도 그의 작업 세계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연극을 만들면서도 계속해서 연극이라는 형식 자체를 의심하고 질문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무대에 설 수 있는지, 누가 발언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연극이 반드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여야 하는지.

이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조금 역설적입니다.

 

연극을 계속 의심해온 사람이 결국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극상 가운데 하나를 받았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상을 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발한 공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입니다

전기밥솥 세 대가 무대에서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시선을 끕니다.

 

하지만 구자하의 작품이 단순히 “특이해서” 국제입센상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밥솥과 영상, 음악 같은 낯선 요소를 이용해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불안, 개인의 외로움,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인간과 기술의 관계까지 서로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가 만드는 것은 기계가 등장하는 공연이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계속해서 사람의 삶입니다.

 

수상 다음 날, 《Cuckoo》는 다시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번 수상이 더 현재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있습니다.

 

시상식 바로 다음 날인 9월 27일, 오슬로 국립극장 메인 무대에서는 구자하의 대표작 《Cuckoo》 공연이 예정돼 있습니다.

즉 이번 소식은 단순히 과거 작품을 평가해 상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수상과 동시에 그 작품 자체가 다시 관객 앞에 올라가는 겁니다.

 

전기밥솥 세 대와 함께 말이죠.

 

어쩌면 연극의 모습도 바뀌고 있는 걸까?

구자하의 수상은 한 한국 공연예술가의 성공을 넘어 조금 다른 질문도 남깁니다.

 

우리는 보통 연극이라고 하면 무대, 배우, 대사, 관객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배우 자리에 전기밥솥이 들어가고, 영상과 음악, 로봇 기술이 공연의 일부가 된다면 그것도 여전히 연극일까요?

 

국제입센상의 선택은 적어도 “그렇다” 쪽에 가까워 보입니다.

 

오히려 기술이 일상이 된 지금, 연극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수상이 더 흥미롭습니다

구자하는 2026 국제입센상의 아시아 최초이자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소식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기록 자체보다 ‘어떤 작품이 이 상을 받았느냐’입니다.

 

전기밥솥과 대화를 나누고, 개인의 기억을 한국 현대사와 연결하고, 음악과 영상, 기술을 뒤섞으며, 끊임없이 “이것도 연극일까?”라고 질문해온 사람.

 

그 사람이 결국 세계적인 연극상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구자하가 보여준 것은 새로운 형태의 연극이라기보다, 연극이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전기밥솥에서 “밥이 완성됐습니다”라는 음성이 나오면, 조금 다르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

 

출처

  • 연합뉴스, 2026-09-27, 구자하 국제입센상 시상식 보도
  • International Ibsen Award 공식 사이트 - Jaha Koo 수상자 소개 및 상 소개
  • Festival d’Avignon 2026 - 《Cuckoo》 작품 소개
  • Nationaltheatret (Oslo) - 《Cuckoo》 공연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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